기도, 나를 빚어내는 자리입니다. (2018년 11월 25일 목양칼럼)
기도, 나를 빚어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보이는 것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누구라고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자리로 그리스도인의 자기 인식이 결정됩니다. 이 세상에 같은 공간안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지만, 세상의 흐름안에 다른 흐름을 만들어내고 세상에 매여서 끌려가지 않고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시면서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고 양식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뜻에 반하고 자신의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불편함속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줄곧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에 순종한다는 것은 나 홀로 행하는 알지 못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그 일을 행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었고, 동시에 예수님의 뜻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맺어진 관계의 친밀함과 기도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마음의 소원은 동시에 예수님의 소원이 되고, 결국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시는 곳까지,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가셨습니다.
무엇을 할까? 무엇을 행하는가?하는 것은 항상 두번째입니다. 무엇을 효과적으로 잘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답게 하는 것입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성과중심의 결과물을 내놓으라는 경쟁과 긴장에 우리를 집어넣고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 한 번 더 고려하셨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오늘도 교제하고 바라보는 주님의 눈에서 읽히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고 엎드려 있는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고 그분의 온자락을 만지고, 그분의 십자가에 붙들려 그분의 손길안에 머무는 자들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은 우리가 일어서서 무엇인가를 할 때가 아니라, 이미 기도의 자리에서 다 결정이 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갖힌 자신의 처지를 놓고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원하는 것처럼, 빨리 감옥에서 나가기 위한 방식을 찾기 위해서 골몰하지 않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놓임받음 보다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감옥에 매여있는 것보다, 기도하는 자리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아니라, 여전히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여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놓임받음이 아니라, 감옥에서도 복음전함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두고 기도를 요청합니다.
엎드림의 자리, 그곳에서 바울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가장 고유한 자신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자신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로 살아갑니다. 기도의 자리는 예수님에게 그런 것처럼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 바울로 빚어내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 기도의 자리를 사랑하고 그 기도안에서 주님의 모습으로 그분께 빚어지길 원하는 소원함을 가진 다음 가족들을 축복합니다. 한 주도 기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채우는 충만함으로 지내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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