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목양칼럼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제가 시드니에 처음 올 때 저는 시드니에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의 관심은 교회를 잘 섬기고 그 교회를 통해서 선교사로 파송 받으려는 마음이 전부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파송해주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곳에 파송할 만큼 선교와 주님의 나라에 대한 물불 안가리는? 헌신이 있는 교회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드니를 올지 말지를 결정하는 마지막 전날에 이규현목사님께서 김목사 말고 한 분이 더 있는데, 둘 중에 누구를 청빙하실 지 고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저보다 나이가 4살 위이시고, 큰 교회 사역 경험도 있으시고 외향형에 시드니에 대한 열정으로 뭉쳐있는 잘 준비된 사역자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말자 저는 “그 분이 새순교회를 가셨으면 더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분이라면 목사님의 사역을 더 잘 지원하고 도와드릴 수 있는 준비된 분이시라는 마음의 확신이 왔습니다. 마음에 아쉬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연락이 온 것은 저에게 였습니다. “김목사님이 시드니에 와서 젊은이 사역을 맡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약 13년 정도가 지나고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그 분이 더 시드니와 새순교회에 잘 맞았는데, 왜 그분을 부르시지 않고 저를 불렀냐고… 목사님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그 때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의 대답은 “그냥 사례비를 반반씩 나눠주고 둘 다 데리고 가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건은 저에게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태도를 배우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유학휴가를 보내고 있던 미국에서 하와이에 있는 모 선교단체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 대표께 참가 허락을 받고 비행기표를 사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직전 주 주말에 행정담당자이신 사모님에게 안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 한달 생활비였던 3천불을 날렸을 때에도 같은 기준으로 대했습니다. 그 뒤에서 가치와 이익이 충돌하면 저의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바로 교회였습니다. 무엇이 교회를 위하는 것인가? 무엇이 주님의 교회를 위하는 결정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이기는 길이었습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이기는 길입니다. 물론 함께 이기고, 교회가 이기고, 주님의 나라가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사라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라지지 않으면 주님의 나라의 승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나였습니다. 내가 지면서 함께 이기는 법, 상대를 세워주면서 함께 사는 법. 그것이 바로 교회가 사는 법이고, 이 세상의 가치를 이겨내는 주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을 배우고 나서는 조급함이 없어졌습니다. 무리수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일하심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가도 평안하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의 잘됨을 축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은 이기는 것이고, 딛고 올라서는 것이고, 쟁취하고 더 가져야 한다는 상식을 가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 결과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등을 돌리고 관계의 깨어짐으로 가기가 십상입니다. 승리한 것 같지만, 승리의 끝에서 뒤를 바라볼 때 피 흘리고 있는 수 많은 적들과 그 만큼 아픈 나를 만나게 되죠! 양날의 검이 있는 브메랑이 되어서 결국은 나에게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입니다. 가족은 서로를 위해서 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서로에게 양보할 마음이 있는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당신의 넉넉함을 잊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집이 평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 중심성에 길들여진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높아진 것은 깍고, 낮아진 것은 채울 수 있는 사람. 주님은 그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더 큰 승리와 더 큰 나라를 위해서. 함께 동역자된 다음 가족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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